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배경 == 1939년 3월의 체코 합병으로 히틀러는 영불이 깜짝 놀라 여태까지의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런 논리로 군부 및 정치, 경제계를 안심시켰고 또한 독일의 회의론자들조차도 제발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빌고있었다. 그렇게 안 됐다간 독일이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특히 히틀러에 반대하는 군부가 더 그랬는데, 당시 독일군으로서는 '''[[양면전쟁]]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했다간 반드시 패전한다]]'''는 명제에 깊게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초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 문제]], 그 해 가을에는 상술한 [[뮌헨 협정|체코슬로바키아 문제]], 1939년 초 [[슬로바키아]]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괴뢰화]]와 [[체코]]의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완전 합병]] 등 이미 독일에게 외교적으로 수차례 통수를 맞은 상태였다. 그래서 연합국, 특히 영국은 아무리 늦어도 1939년 초, 이르면 1938년 가을에는 독일과 일전을 치룰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간기 대공황과 군축으로 당장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재무장마저 1938년에서야 조심스럽게 시작한 상태였다. 1939년 초, 독일이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의 영유권을 제기하자 연합국은 폴란드에게 안전 보장을 선언하고 독일이 침략을 벌이면 그때는 진짜로 전쟁이라며 공갈을 날리면서도 대독전쟁의 발발 자체는 극력 회피했다. 한편 공산당을 극단적으로 탄압하고 동유럽 정복을 주장하는 독일을 소련은 당연히 좋지 않게 보고 있었고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은 영-불-폴-소-루로 이뤄진 독일 포위망을 구성하려 했으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던 폴란드와 루마니아는 협력을 거부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을 제압한 적군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영토 수복과 [[중유럽]] 혁명수출을 목적으로 동유럽에 전면침공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중흥을 꾀한 폴란드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루마니아도 러시아 제국 붕괴를 틈타 베사라비아와 통일을 이룩했고 이 때문에 전간기 내내 소련과 영토분쟁을 벌였다.] 게다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후술할 협상에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소련군 주둔을 요구했고 이것은 누가봐도 동유럽을 자기 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당연히 영국-프랑스는 소련과의 동맹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이때는 1940년 프랑스에서 연합국이 호러쇼를 찍기 전이라서 영국-프랑스 수뇌부는 독일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다. 나중에 [[폴란드 침공]]에서 폴란드가 한달만에 털린 것은 그냥 폴란드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결과를 다 아는 오늘날에야 영프가 멍청하다고 여기지만 제한된 정보만 갖고 판단해야 했던 영프 수뇌부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체제에 건성으로 반응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애써 회담장을 마련했건만, 비행기나 열차도 아닌 배를 타고 와서 관광이나 하는 영프 협상단에게 격노했다. 소련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분노였는데, 일단 당시 소련의 협상단 대표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개인적으로도 절친한 친구였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 게다가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어떠한 문서에도 보고 없이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위임장도 영불 협상단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보로실로프 말고도 당시 소련의 최고지휘관 거의 전부를 회담장에 대동했을 정도로 소련은 이 협상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는 협상단 대표인 조제프 두망크 장군이 협정에 서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 발발 시 110개 사단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내놓는다. 양측 대표의 격이 너무 차이났다는 점[* 두망크 장군은 프랑스군 서열 40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최측근이다.]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내용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결정적 단서조항을 걸었으니, 프랑스의 110개 사단은 프랑스 국경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것 이었다. 즉 본인들은 방어에만 주력할테니 독일 본토 공격은 소련이 피흘려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경우, 대표로 온 레지널드 드락스 경은 전권 위임은 커녕 어떠한 사항에도 동의할 권한이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 소련 측이 '독일이 주변국을 침략할 경우[* 당시 소련과 독일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 소련은 120개 사단을 동원하여 막겠다, 영국은 몇개 사단을 내놓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자 파견할 수 있는 지상군이 불과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대답을 듣고 나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진지하게 반문했을 정도로 당황한 소련 측이 캐물었더니, 영국 협상단 측에서는 사실 그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은 단 4개 사단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머지 12개 사단은 급하게 편제되는 중의 징집병이라 아직 훈련도 못 끝냈기 때문이다.] 이에 스탈린이 회담 종료 후 영국 대사에게 직접 구체적으로 더 물어보니 영국 대사의 대답은 "사실 즉각 파견이 가능한 사단은 2개 사단에 불과하며 나머지 2개 사단은 아직 완편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대륙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원정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비슷한 국력의 유럽대륙 국가보다 애초에 육군이 적긴 했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영국군 체계가 박살났고 당시 실질적인 전력은 독일을 경계하여 급조한 해당 사단들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후술할 됭게르크로 영국 육군은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 물론 해군이 주력인 섬나라에 대규모 육군을 기대하는 게 별 가능성이 없긴 했다.] 때문에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독일을 싸움 붙인 후에 [[어부지리]]를 기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실제로는 10개 사단을 파견했지만, 그래도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매우 적은 규모다. 하여튼 스탈린의 영국에 대한 의심은 전후까지 계속된다. 당장 위의 보로실로프도 영국 스파이 드립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게 완전히 헛다리는 아니었던 것이, 종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대독전의 못해도 3분의 2를 수행하고 독일 영내에서 놀고 있던 소련 육군을 추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이 되는 중부 유럽 국가들의 영토 밖으로까지 쫓아낼 계획으로 [[언싱커블 작전]]을 준비했다가 미국과 내부의 반대로 취소한 적이 있다. 이때 몽고메리가 한 명언이 '''군사학의 제1법칙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대전기 말에 나치 독일에서 '우리 싸우지 말고 같이 손잡고 소련 놈들 물리치자!' 이러는 걸 영국이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 후 그가 수상직에서 나오고 영국은 그 당시 최첨단 군사기술이던 제트엔진을 거의 꽁으로 넘겨주는 멍청한 짓을 했었다.] 결국 소련은 영불과의 협상이 소득없이 결렬되자 5월 3일 반독일파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여 독일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고, 이를 감지한 독일은 앞선 영불 협상단과 달리 외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보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양면전쟁을 무조건 피하려했던 히틀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히틀러는 동유럽의 발트 3국과 핀란드, 폴란드 동부를 넘겨주었고 당연히 스탈린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러한 외교는 나중에 서방 측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된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지난 6개월 동안 [[그단스크|단치히]]의 영유권 문제로 갈등한 끝에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를 [[폴란드 침공|침공]]하였다. 당시 히틀러는 2차대전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 침공을 제대로 된 전쟁보다는 앞선 체코 합병과 유사한 무력 시위, 퍼레이드 정도로 여겼다. 그 이유는 당시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병력의 규모, 훈련도, 장비의 양과 질, 군수 보급 체계 등 뭐 하나 우위를 점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프랑스와의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수뇌부는 [[크릭스마리네|해군]]의 [[Z 계획]] 등 군사력 증강, 군수 공업 시설 건설이 완료되는 1945년 전후를 프랑스 침공 시점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군수 생산은 연합군의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1944년 가을에 정점을 찍은 바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건설했던 군수 공업 시설이 그때야 완전히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폴란드 침공 소식을 들은 영국과 프랑스는 이쪽에서 한번 독일에 공갈을 친다면 전선 부담을 안고 있는 독일이 물러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곧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정오 독일에 앞으로 5시간 내에 폴란드 침공을 중지하거나 침공을 중지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 및 제3제국 수뇌부의 반응은 이러하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중략)...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는 매체의 이미지처럼 고함치고 날뛰는 성격이 아니라 남들도 못할 만큼 차분했고 신중했다고 한다. 우리가 [[다운폴]]에서 본 미쳐 날뛰는 모습은 그야말로 극한에 처해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다. 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뮌헨 폭동]] 때도 그렇고 히틀러는 정말 끝장난 거 같은 상황에서는 절제력을 잃곤 했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울분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건가?"''' >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외교적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 >'''[[헤르만 괴링|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이번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 출처: 칼 하인츠 프리저 저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 2-1장.] 이 상황은 회의론자들에 의해 이미 독일에서 매우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전후로 군부에서 [[슈바르체 카펠레|반 히틀러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군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과 관련해서 서방, 특히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것임을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었다. 심지어 만일에 대비해 대영/대프랑스 방어전을 계획하던 참모본부의 친히틀러파 참모장교들에게 "당신들 그러다가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걸 핑계로 쳐들어올지도 모르오! 그걸 당신들이 책임질 거요?"라며 면박을 줬을 정도.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1939년 9월 3일부로 독일은 양면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말로를 잘 알고 있어서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폴란드 공격을 위해 거의 모든 전력이 동부전선에 몰려있었고, 서부전선은 두 강대국에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때는 반 히틀러 진영은 히틀러가 한시라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거나, 차라리 정말 그의 말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개전이 확실시되자 9월 7일~16일 동안 프랑스는 1차로 11개 사단, 최종적으로는 총 41개 사단을 [[자를란트]]로 배치하여 30km를 밀고 들어갔다. 사실 프랑스군의 상태도 엉망이라 자르 진격에 동원된 41개 사단 중에서 제대로 완편된 사단은 고작 3개에 불과했으나, 이에 맞선 독일 제1군은 중장비도 없이 말 그대로 총만 든 군중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부대에 따라 군복, 소총은 커녕 집에서 챙겨온 삽, 독일 국방군 스탬프가 찍힌 완장만 찬 병사만 만 명 단위로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이들은 프랑스군과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고 도시, 마을을 소개하고 주요 길목에 막대한 양의 지뢰를 매설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이어서 9월 16일을 기해 프랑스가 전면 동원령을 발령함에 따라 이제 절대로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르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9월 17일자로 철수하여 마지노 선 서쪽의 원래 주둔지로 돌아가 버리고 서부전선은 한동안 [[가짜 전쟁|이 기묘한 소강사태]]가 계속 유지된다. 정말로 프랑스는 태초에 소련에게 표명했던 것처럼 자신의 국경을 독일이 넘지 않는한 공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킨 것이다. 영국 역시 프랑스로 해외원정군을 파병했지만 프랑스 국경에서의 대독전략은 프랑스와 동일한 전략을 시행했다. 즉, 히틀러에게 폴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낸 다음 프랑스를 격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약 1달 만에 폴란드 전선을 마무리한 히틀러와 독일군은 침공이 완료된 직후 1939년 10월 9일을 기해 총통 지령 6호(Führer-Anweisung N°6)를 발령, 프랑스 침공 계획을 공식화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lus forts.png|width=100%]]}}}|| ||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br](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지도에 몇 가지 오류가 있는데, 큰 오류로 [[튀르키예]]가 칠해져 있지만 영불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며 참전시기도 1945년 2월이다. 또한 [[아이티]]도 칠해져 있지만 이미 1804년 프랑스에게서 독립하였고 참전 시기도 1941년 12월이다. 게다가 [[7년 전쟁]]으로 영국령으로 넘어간 퀘벡뿐만 아니라 캐나다 전역까지 프랑스령으로 칠해져 있다.] || 이렇듯 독일 입장에서 상황이 어떻게든 조금씩 풀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 성장과 공업력을 자랑하고 있다 한들, 상대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최강국인 [[영국]]과, 그 영국과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